한 달에 한 번 독서모임을 빙자한 근황 토크 모임을 수년간 지속하고 있다.
그래서 자의 반 타의 반 꾸준히 책을 읽고 있는데, 이번 달의 책은 노리즈키 린타로의 <요리코를 위해>였다.
일단 책 표지 디자인은 칭찬합니다..
새빨간 컬러와 소녀 이미지, 그리고 제목까지 삼박자가 잘 어우러져서 존잼 추리소설일 것만 같은 기분이 듦.
그리고 혹시 이 책이 어떨까 궁금해서 살까 말까 고민 고민하다 어찌어찌 이 누추한 블로그까지 흘러들어오신 분이 계시다면 제가 읽을 분 안 읽을 분 간단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읽을 분:
1. 추리소설을 너무 사랑해서 이야기가 개 빻았건 말건 나는 1도 상관없고 그냥 유잼이기만 하면 읽을 것이다 하시는 분
2. 노리즈키 린타로를 사랑해서 그가 쓴 책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읽어야 하는 분
안 읽을 분:
그 외 모두.
전 이 책을 매우 깨끗하게 읽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띠지조차도 안 구겨지게 조심조심하면서 읽었습니다. 왜냐고요? 읽고 있는 와중에도 이 책은 다 읽고 빨리 내다 팔 아야겠다는 feel이 왔기 때문입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좋은 등급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 이 아래서부터는 책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책을 읽을 계획이 있으신 분이라면 뒤로 가기를 추천드립니다.
일단 이 책은 재미없는 책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점이 저를 더 슬프게 합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못 쓴 이야기는 아닙니다. 니시무라의 일기로 시작하여 사건을 먼저 보여주고, 주인공 노리즈키 린타로가 재수사를 해나가며 차차 사건을 풀어가는 구조도 흥미롭고 이야기의 기승전결도 탄탄한 편입니다. 억지 반전을 꾀하지도 않으며 전반부에 적절히 풀어놓은 떡밥도 깔끔하게 회수하는, 오히려 잘 썼다에 가까운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 책을 읽고 왜 그렇게 열 받은 것일까요?
이 이야기에는 여러 명의 여자 캐릭터가 등장하는데(생각해보면 남자 등장인물보다 여자 등장인물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함) 이 다양한 직업군과 연령대의 여자 캐릭터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오징어 게임의 달고나처럼 누가 힘주고 누른 것처럼 납작한 캐릭터들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남캐들도 좀 전형적인 부분이 많았고 이 책은 플롯이 주가 되는 이야기이지 캐릭터가 주가 되는 이야기는 아니긴 했지만, 남자 캐릭터들은 그래도 좀 살아 숨 쉬는 인간처럼 느껴졌던 반면 여캐들은 현실이 아닌 만화에서나 등장할법한 인물들로 느껴졌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종류의 여캐만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는 자기의 의지로 움직이는 인간이 아닌, 단지 소설 속에서 어떠한 내용을 알려주기 위한 장치로서만 존재하는 여캐이고, 두 번째는 남성 작가에 의해 지극히 타자화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과장된 욕망을 가지고 이를 휘두르는 여캐입니다.
등장하는 모든 여캐에 대해 외모나 성적 매력도에 관한 묘사가 빠지지 않는다는 점도 읽는 내내 저를 은은하게 열 받게 했습니다. 이런 묘사가 이 이야기의 전개에 필수적인 요소이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저런 묘사가 필수적일 수밖에 이야기를 썼다는 게 더 큰 잘못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책에는 납작한 여캐들이나 빻은 묘사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사건의 중심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요리코"인지라, 사건의 해결 과정은 결국 요리코의 진실을 찾아나가는 과정인데.. 결말부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진실이 참 뭣 같기 그지없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두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어느 10대 여자애가 그런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할 것이라고 작가는 생각할 수 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요리코에 관한 진실은 안타깝고 슬픈 사연이라기보다는 그저 남성 작가가 떠올릴만한 남성향 판타지 그 자체입니다.
차라리 예상이 가지 않는 말도 안 되는 결말이었다면 화가 덜 났을 것 같은데 솔직히 전반부의 니시무라의 일기만 보고도 얼추 감이 와서 더 괴로웠습니다. 읽는 내내 ㅅㅂ 아닐 거야.. 아니라고 해.. 하고 자기부정을 이어갔지만 결말은 (나쁜 쪽으로) 저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결말부에 나오는 니시무라의 마지막 선택도 대박 어이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죗값을 치르는 이야기는 할복 문화가 있던 일본에서만 통하는 것 아닌가 싶은 것... 일본문학에 대한 박경리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되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저는 이 책은 내 돈 내산 했기 때문에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에 대한 증오가 한층 커졌습니다.
결말부에 가서는 읽으면서 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노리즈키 린타로가 어디 사는지 궁금해서 구글에 검색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노리즈키 린타로가 대한민국의 20대 여성에게 살해당했다는 기사가 뜨지 않은 것일까요?
그건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읽은 책 뒷 쪽의 작가의 후기에서 그가 이 이야기를 89년에 썼다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빻은 이야기는 싫어하지만, 그게 20세기에 쓰인 것이라면 어느 정도 정상 참작해주는 편입니다. 그의 다른 작품은 읽어보지 않아서 요즘에는 어떤 이야기를 쓰는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요리코로 인해 심각한 내상을 입은 지금은 당분간 일본 남작가의 글은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엉망인 책이었으면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후기 남길 생각도 안 했을 텐데 또 재밌게 읽긴 읽어서 더 큰 아쉬움과 분노가 남았습니다. 다음부터는 더욱 신중히 독서모임 책을 고르도록 반성하겠습니다..
노리즈키 린타로 <요리코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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